정봉수 - 나의 젊음 나의 사랑

다음은 98년 경향신문에서 연재한 [나의 젊음 나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14회에 걸쳐 연재한 정봉수감독의 일대기를 소개한다. 최근 팀소속의 선수들이 이탈하여 팀이 존폐위기에 처하고 또 부상과 건강악화등의 시련기를 맞고 있지만 한국 마라톤의 대부로서의 위상은 결코 평가절하될 수는 없다.


  1. 해냈다 '2시간7분 44초'
  2. '밥'줄여 '뒷심부족' 해결
  3. '식이요법' 첫 효험 '김완기'
  4. 싸움·달리기 잘한 모범생
  5. 전쟁중 '육군 대표선수'로
  6. 휴가중 첫눈에 반한 '아내'
  7. 미국서 습득한 '신지식'
  8. "정감독,금메달 따봅시다"
  9. '김완기'로 '화려한 서막'
  10. '너무너무 탐나는 선수'
  11. 효자 황영조와 '어머니'
  12. '마의 10분대 벽' 훌쩍넘다
  13. 56년만의 '올림픽 제패'
  14. 2년 남은 시드니의 휴일'

해냈다 ‘2시간7분 44초’

한국 마라톤의 역사를 다시 쓰는 정봉수 감독(64·코오롱마라톤). 세계적 마라토너 황영조를 빚어내고 이봉주를 마름질하고 있는 「독사」 조련사. 92년 8월 바르셀로나올림픽, 94년 10월 히로시마 아시안게임,96년 8월 애틀랜타올림픽과 12월 후쿠오카, 그리고 지난 4월19일 네덜란드 로테르담대회까지 「감동의 일요일」을 이끌어내며 「살아있는 마라톤 한국」을 증명했다. 그러나 우승의 환호는 선수들의 몫. 감독은 그저 기쁨에 들뜬 선수를 다독거리며 다음 대회를 준비할 뿐이다. 황금다리를 창조한 정감독. 하지만 그는 태극마크 한번 달아보지 못한 단거리선수 출신. 53년 한국전쟁때 입대,장기하사로 근무하며 육군 원호단(상무 육상팀) 감독을 역임했다. 87년 코오롱마라톤팀 창단감독이 된 지 어느덧 12년. 2시간12분대에 머물던 한국 마라톤을 2시간7분44초로 여섯차례에 걸쳐 끌어올린 정감독의 오기와 집념의 시간을 더듬어본다.

「2시간7분44초」. 만 4년의 긴 기다림과 노력 끝에 세워진 한국 신기록. 지난 4월19일 일요일 오전. 네덜란드 로테르담 마라톤대회에 출전한 이봉주가 전해준 내 생애 가장 기쁜 선물이다. 비록 1위 자리를 스페인의 파비앙 론 체로(2시간7분27초)에게 아깝게 내주었지만 이를 악다물고 내달린 그 시간이 갖는 의미는 상당히 컸다.

94년 4월18일 제98회 보스톤 마라톤대회에서 황영조가 2시간8분9초로 한국 신기록을 세운 이후 4년 동안 끊임없이 도전했지만 허사였다. 그러나 「연습벌레」 이봉주가 드디어 일을 저지른 것이다. 황영조가 세운 기록보다 무려 25초를 앞당겼다. 드디어 「마의 8분대」를 넘어 꿈에 그리던 7분대로 진입한 것이 내겐 더 벅찬 감동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놈.

세계 마라톤 선수들에겐 「꿈의 고장」으로 여겨지는 네덜란드 로테르담. 10년전 바로 이곳에서 에티오피아의 벨라이네 딘사모선수가 42.195㎞ 풀코스를 2시간6분50초만에 달려 세계신기록을 작성,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 이후 그의 기록을 아무도 깨지 못하고 있다.

로테르담으로 출발하기 위해 짐을 싸는 오인환 코치와 김순덕 총무를 비롯한 선수들의 환한 얼굴을 보면서 좋은 예감이 들었다. 우승은 아니지만 상위 입상은 가능할 것이고, 어쩌면 이번엔 한국 신기록을 작성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3월10일부터 경북 김천의 그랜드호텔에 캠프를 차리고 몸만들기를 할 때 본 이봉주의 모습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96년 전성기 때의 모습을 되찾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1,300m정도를 전력질주하고 1분 정도 쉬듯 천천히 달리기를 10회 정도 반복하는 도로인터벌 훈련에서 좋은 컨디션을 보여주었다. 또 매일 15㎞를 전력질주로 달려야 하는 고된 훈련도 그는 꿋꿋하게 견뎠다. 로테르담에 함께 가지 못하는 나는 연습 때처럼 최선을 다해 달라는 부탁만 했다.

차일피일 미루어왔던 권은주(코오롱 여자마라톤팀 소속)의 족저수술 일정이 묘하게도 로테르담대회와 겹쳐 그녀와 함께 일본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봉주가 뛰는 시간은 19일 저녁. 권은주의 수술을 끝내고 일본에서 귀국한 시간이 19일 아침. 김포공항에서 대치동 숙소로 와 휴식을 취했다. 저녁 무렵 대회 가 열리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겼을 때 오인환 코치로부터 전화가 왔다.『현재 바깥 온도가 10도 미만입니다. 바람도 세게 불지 않고 선선한 게 뛰기에 아주 좋은 날씨에요. 봉주의 컨디션도 괜 찮고요. 좋은 기록을 낼 것 같은 기분이래요』 전화를 끊은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보통 기온이 15도 이상이면 체내의 산소 소모가 많아지고 피로가 쉽게 오기 때문에 좋은 기록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처럼 기온이 10도 미만일 경우엔 체온 발산도 적절하고 체내 산소 소모량도 적으면서 피로 회복도 빨라져 마라톤하기엔 아주 적당하다.

곧 경기가 시작된다는 전화가 다시 왔다. 5㎞를 뛸 때마다 오코치에게 현지 상황을 보고받고 전화로 작전지시를 하기로 했다. 20㎞ 지점을 통과한 시간이 59분49초. 30㎞ 지점을 1시간30분03초에 끊었다. 다시 35㎞ 지점을 1시간45분27초에 뛰었다. 기분이 상쾌했다. 스페인의 론 체로가 조금 앞 서서 뛰고 있었지만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는 이봉주보다 빠른 기록을 갖고 있지 않은 선수였기 때문이다. 10년 전 세계 신기록을 작성했던 딘사모가 뛴 구간 기록과 거의 같다는 것을 느낀 나는 새로운 욕심이 생겼다. 그러나 35㎞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코치로부터 전화가 왔다. 약간 다급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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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줄여 ‘뒷심부족’ 해결

못살던 시절 우리선수들의 과식습관. 확장된 위때문에 마지막에 허기가 져 스퍼트를 못했다. ‘소식과 풍부한 단백질 섭취’. 6번의 한국신기록 비결은 ‘식이요법’에 있었다.『스페인 선수가 스퍼트를 내기 시작했어요. 35㎞ 지점을 지나자마자 봉주와의 거리차이가 더 벌어졌어요. 300m 정도 차이는 나는 것 같아요. 감독님 말대로 25㎞ 지점부터 선두와 바싹 붙으라고 계속 신호를 주었지만 쉽게 되질 않나봐요』 전화를 끊은 나는 약간의 조바심이 생겼다. 남은 거리는 약5㎞. 출국하기 전 봉주의 컨디션이라면 세계신기록도 바라볼 수 있었는데…. 지난해 겨울 훈련중 당한 왼쪽허벅지 부상과 올2월 훈련중 같은 부위에 잠깐 나타났던 통증 때문에 고생했던 봉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포기하지는 않았다.

2시간7분44초. 2위지만 한국신기록. 지난 4년 동안 갖은 발버둥을 쳐도 깨지지 않던 기록을 비로소 깬 것이다. 더욱이 8분대를 넘어 7분대로 진입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봉주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너는 이제 한국 마라톤의 기둥이다』 오늘은 편하게 잠을 잘 것 같았다. 그러나 「뒷심 부족」이란 우리 선수들의 고질적인 문제가 다시 머리 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17초. 1위와 약 100∼120m 차이. 35㎞까지는 아주 좋았던 기록. 마지막 7㎞가 문제다.

'뒷심만 조금 더 길렀더라면 더 좋은 기록이 나왔을 텐데'라는 회한이 밀려왔다. 이제부터는 35㎞ 지점 이후의 훈련 보완과 조금 변형된 식이요법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오롱 마라톤팀 감독을 맡은 이후 12년간 오늘까지 여섯차례나 한국신기록을 작성했다. 그 비결은 바로 「식이요법」. 그러나 그건 별 것 아니다. 바로 소식(小食)과 많은 단백질 섭취에 있다.

내가 식이요법에 관심을 가진 것은 76년 마라톤을 지도하면서부터. 체격조건이 우리와 비슷한 일본선수들이 세계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올릴 때였다. 그래서 77년부터 해마다 일본으로 전지훈련을 떠나 그들의 훈련방법을 열심히 지켜봤다. 서울로 돌아와 똑같은 방법으로 훈련하고 대회에 출전했지만 우리 선수들의 성 적은 형편 없었다. 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절망감만 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체격조건에서 오히려 나았던 우리 선수들이 일본 선수에게 뒤지는 데에는 뭔가 다른 문제가 있다고 여겨져 장고(長考)에 장고를 거듭했다. 그러나 문제는 쉬운 곳에서 찾아졌다. 바로 「밥」이었다.당시만 해도 먹고 살기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평소 고른 영양섭취를 할 수 없었던 우리 선수들은 허기가 질 때마다 밥을 마구 먹는 바람에 위가 확장될 대로 확장된 상태였다.

특히 마라톤의 최대 고비인 32㎞ 지점에선 허기가 져서 도저히 뛸 수 없다고 호소해왔고 막판 스퍼트를 내야 할 40㎞ 지점에 이르러선 거의 탈진상태가 됐다. 이렇게 후반에 약한 우리 선수들이 마구잡이로 밥과 고기를 먹는 것을 지켜본 일본 감독은 위가 확장된 상태에서는 아무리 잘 뛰어도 마지막 스퍼트를 할 수 없다고 넌지시 귀띔해 주었다. 그의 말에 충격을 받은 나는 그날 저녁부터 선수들에게 먹는 밥의 양을 줄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선수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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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이요법’ 첫 효험 ‘김완기’/‘공기밥 한그릇’.

선수들 불만이 대단했다. 밥 훔쳐먹다 들키고 혼쭐나기 일쑤. 그러나 서서히 빛을 보기 시작했다. 90·91년 연거푸 세운 김완기의 한국신기록. 『감독님, 이렇게 적은 밥을 먹고 어떻게 그 긴 거리를 뛰라 는 말입니까』

새벽운동을 마치고 상쾌한 기분으로 밥상에 앉은 선수들. 그러나 자신들 앞에 놓인 밥그릇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린아이 손바닥만한 공기에 담긴 적은 밥.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 선수들에게 내뱉은 「식사 끝」. 곧이어 터져나온 볼멘소리들. 일본 마라톤 감독이 전해준 말로 쏟아지는 불만을 일축시켰다.

그 자리에선 수긍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 선수들. 하지만 고픈 배를 어쩌지 못해 한밤중에 몰래 외식을 하거나 고양이처럼 부엌에 들어가 밥을 훔쳐먹기도 했다. 그런 선수는 혼쭐이 났다. 심할 때는 매도 들었다. 한창 크는 선수들을 배불리 못먹이는 내 가슴은 쓰리다 못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일본을 따라잡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 그런 일이 더욱 빈번해지자 선수들을 불러모았다.

내가 준비한 것은 고무주머니 2개와 하얀 쌀밥. 한쪽 주머니엔 1되 분량의 밥을, 다른 주머니엔 1홉 분량의 밥을 넣었다. 두명을 불러세우곤 2개의 주머니를 2시간 가까이 흔들어보라고 했다. 엉뚱한 나의 지시에 의아해 하던 선수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나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주머니를 사람의 위라고 생각해보자. 이렇게 많은 밥을 먹고 2시간 가까이 뛴 사람이 막판 스퍼트를 할 때쯤이면 더 많은 허기를 느끼게 된다. 즉 지구력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평상시 음식 절제와 소식을 하고 칼로리가 높은 음식을 먹는다면 중간에 포기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대신 균형잡힌 식단으로 너희들의 영양은 충분히 관리해 주겠다』

2시간 가까이 이마에 땀을 흘리며 흔들어댄 결과는 1되 분량의 밥을 넣은 주머니가 1홉 분량의 밥을 넣은 주머니보다 더 푹 꺼졌으며 빈 공간이 더 많았다. 그 이후 몰래 밥을 먹다 들키는 선수는 없어졌다. 그대신 그들에게 밥보다는 반찬, 특히 고기와 야채, 과일은 먹고 싶은 대로 맘껏 먹게 했다.

단숨에 효과를 볼 수 없었던 식이요법. 그러나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식이요법에 확실한 믿음을 준 것이 바로 「김완기」였다. 90년 동아마라톤대회에서 김완기가 「2시간11분34초」로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 이듬해 김완기는 또 다시 조선일보 마라톤에서 2시간11분02초로 자신의 기록을 32초 앞당기며 한국 마라톤 부흥기를 열었다. 이제 그 누구도 나의 식이요법에 토를 달지 않는다. 오히려 요즘엔 「고기 다이어트」니 「황제 다이어트」니 하며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고 있다고 하니 기쁘기 그지없다. 하지만 나이 어린 사람은 의학적·정서적으로 위험하니 하지 않는 게 좋다.

하늘 아래 첫동네 「경북 금릉군 증산면 유석리」가 나의 고향이다. 산 깊고 물 맑고 공기 좋은 동네. 소문난 장난꾸러기로 알려진 나. 마을에서는 내가 지나가면 「독종(?)이 간다」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악으로 똘똘 뭉친 독종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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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달리기 잘한 모범생

초등학교 5년간 반장에 ‘정의의 주먹’ 명성. 맨발로 산·들 누비며 달음박질하는게 ‘놀이’였다. 만능운동선수이던 담임선생의 친절한 지도. 운동회·각종대회에 나가 우승을 휩쓸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5년 나는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비교적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는 별다른 어려움을 느낄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가끔 엽총을 들고 사냥에 나설 정도로 생활의 여유를 누렸던 분이라고 들었다. 아버지는 술 한말을 메고 가지는 못하지만 앉은 자리에서 마시고는 갈 정도로 소문난 술꾼에 한량이기도 했다. 하지만 인심만은 넉넉해서 주위사람들에게 욕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7살 되던 겨울 어느날. 어머니와 형들이 누워있는 아버지 앞에서 마구 울었다. 너무 어린 나는 그 이유를 몰랐으나 한참 지난 후에야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목재공장 한편에 쌓아둔 나뭇더미가 우르르 무너지는 바람에 깔려 돌아가신 거였다. 철이 들기 전 너무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딱 하나. 말라리아를 심하게 앓아 열이 펄펄 끓던 나를 등에 업고 동네를 돌아다녔던 아버지. 푸근하고 넓게만 느껴지던 아버지의 따뜻한 등.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달리기를 좋아했다. 밥만 먹으면 동네아이들과 모여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별다른 놀이기구가 없었던 때라 아이들과 모여 달음박질하는 게 놀이였다. 맨발로 산과 들녘을 뛰어다녔다. 게다가 나는 타고난 싸움꾼이기도 했다.

특히 타지에서 온 아이들에게 친구들이 맞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김없이 그곳으로 달려가 「정의의 주먹」을 휘둘러 복수를 해주는 「독종」으로 소문이 났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등한시한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6년 중5년간 반장을 지낸 모범학생이었다. 그러나 골방에 앉아서 오랫 동안 해야 하는 공부보다는 괜히 달리기에 마음이 끌렸다. 봄가을 한차례씩 열리는 학교 운동회의 달리기 종목에서는 항상 1 등을 차지했다.

증산초등학교 4학년부터 6학년까지 3년간 담임이던 김영훈선생님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모든 운동에 만능이었던 선생님은 수업후 나를 따로 불러 달리기 주법과 손놀림 등을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선생님과 함께 경북도내 각종 면·군 달리기대회와 초등학교대항 등에 출전해 우승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8·15 광복을 맞은 11살때 큰 흉년이 들었다. 누구에게나 어려운 시절.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급격하게 기울어진 가세 때문에 운동을 못할 정도로 심한 배고픔을 느꼈다.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엔 소나무 껍질과 각종 풀뿌리로 조리한 음식이 자주 올라왔다. 그러나 입이 짧아서 반찬투정을 잘하는 나를 위해 어디서 구했는지 가끔 흰 쌀밥을 차려주기도 했다. 「잘 먹어야 잘 달릴 수 있다」는 말과 함께. 막내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따뜻한 정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육상을 계속하기 위해서 김천시내의 시온중학교로 진학했다. 증산리와 김천시는 백리길. 시내에서 자취를 했던 나는 토요일마다 집으로 1주일간 먹을 쌀과 반찬을 가지러 갔다. 버스조차 다니지 않았던 시골길. 어머니가 해주는 맛있는 밥을 빨리 먹고 싶어서기도 했지만 그 길을 한달음에 내달렸다. 그런 까닭 때문인지 나의 달리기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오히려 더 빨라졌다는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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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중 ‘육군 대표선수’로

중학교 진학후 실력 일취월장. 각종대회 우승하여 고교땐 ‘도대표’ 선발. 그러나 6·25 터지고 ‘훌치기’징집. 다행히 체육특기병으로 운동전념하는 ‘꿈같은’ 행운이 따랐다. 시온중학교도 증산초등학교와 마찬가지로 별도의 육상부는 없었다. 방과후 육상에 관심이 있는 체육선생님이 나를 비롯한 몇몇 선수를 지도해주는 게 고작이었다. 체력단련과 주법연구는 고만고만한 실력을 지닌 선배들과 우리들의 몫. 그런 중에도 나의 실력은 계속 일취월장했다. 거창·상주·성주 등지에서 벌어지는 봄·가을 각종 체육대회를 찾아다니며 시합에 출전했고 연거푸 1등을 했다.

시온고교로 진학한 후 「도대표」로 뽑혔다. 그때 나의 바람은 단거리종목 국가대표가 되어 아시안게임에 출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소박한 꿈은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6·25전쟁이 터졌기 때문이다. 어느날 어머니가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며 간단한 짐을 꾸리신 후 말했다. 『자 우리도 고향을 떠나자』. 우리 삼형제는 어머니를 따라 대구로 피난을 갔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달리기를 잠시 접어둘 수밖에 없었던 피난생활. 그저 하루하루를 연명해가며 사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러던 53년 4월. 친구들과 놀러갔다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대구역 앞을 지날 때였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았더니 군복을 입은 사내 몇이 우리들의 팔을 붙잡았다. 군인이 모자라던 시절. 군에 들어갈 만한 나이의 젊은이들을 마구잡이로 끌고 갈 때였다. 이른바 「훌치기」를 당했던 것이다.

우리는 낡은 군용트럭에 태워져 어디론가 끌려갔다. 군복을 지급받고 옷가지와 신발을 싸서 집으로 보낼 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소포를 끌어안고 목놓아 우실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곤 또다시 이동. 방방곡곡에서 온 장정들이 모인 곳은 제주도. 4주간 혹독한 신병훈련을 받았다.

신병훈련을 마치고 어엿한 군인의 모습을 갖춘 나는 강원도 속초의 7사단 8연대로 배치를 받았다. 부대 분위기는 아직도 전쟁중이라선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긴장을 하고 있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고 한 고참이 친절하게 일러주었다.운이 좋았던지 그 와중에도 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부대원들의 사기를 올려준다」는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예하부대 체육대회가 잇따라 열렸던 것. 제주 신병훈련소부터 줄곧 같이 생활해 나의 달리기 실력을 익히 알고 있던 입대동기들이 장교들 앞에서 「달리기만큼은 정봉수가 제일」이라며 떠벌였다.

대대에서 체육대회가 열리던 날. 경상도대표 실력을 어김없이 발휘해 가볍게 우승했다. 이어 연대·사단·군단 체육대회에서도 연거푸 우승을 거머쥐자 체육특기병으로 선발, 군단으로 전출되었다. 심술궂은 고참 눈치를 보지 않고 고된 사역을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더욱이 밤 늦게 연병장에 집합해 기합을 받거나 이 유없는 매를 맞지 않아도 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그보다 더한 행운은 일반 병사들보다 좋은 음식이 나오고 주어진 시간에 꾀를 피우지 않고 운동만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었다. 정말 내가 바라던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러던 어느날 육군대표로 선발되었다. 곧 있을 「3군대항 체육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서울의 육군본부로 전출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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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중 첫눈에 반한 ‘아내’

육군코치 수락후 휴가차 내려간 고향서 만난 여인. 수많은 편지왕래 끝 2년뒤 결혼. ‘달리기’밖에 모르는 내 뒷바라지에 평생 고생만 한 고마운 아내.육군본부로 전출온 나는 모든 것을 잊고 운동에 전념했다. 육·해·공군 모두 별도의 육상부를 두고 있어서 지금껏 주먹구구식으로 깨우쳐온 달리기주법과 스피드훈련을 보다 체계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 당시엔 큰 국제대회를 제외하곤 별다른 체육행사가 없던 때라 3군대항 체육대회는 큰 축제였다. 각 군마다 이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이 지상의 목표였다.

나는 역기·바벨 등을 들며 단거리선수에게 요구되는 순간적 파워를 키웠고 줄넘기를 하며 순발력과 민첩성을 길렀다. 3군대항 체육대회에 출전, 나의 주종목인 100m 200m 400m계주에서 우승했다. 박해용(현 서울시청 감독) 김병기(경기 부천에서 보디빌딩 운영) 임호근(전 공주사대교수·작고) 등이 당시 함께 활동했던 전우들. 육군에서 10년간 활동했지만 그토록 꿈꿔오던 태극마크는 결국 달지 못했다. 『네 실력은 정말 아까워. 하사 특진은 물론 코치로 승격시켜줄 테니 우리 군에 남아서 후배들을 지도해주면 어떻겠느냐』 62년 만기제대를 앞두고 이젠 무엇을 하며 먹고 살아야 할까를 걱정하던 나에게 체육장교가 넌지시 건넨 말이었다. 잠시 고민을 하게 만들었지만 오랫동안 망설이지는 않았다. 딱히 배운 것도 없고 육상을 계속하고 싶었기 때문에 흔쾌히 수락을 했다.

하사 진급후 맞은 휴가. 고향 김천의 4월은 헐벗은 나뭇가지에 새싹이 돋고 온 산천에 개나리·진달래 등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오랜만에 집을 찾는 내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덜컹거리며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버스. 차창 너머로 들어오는 낯익은 산과 들이 눈물나도록 정겨웠다. 버선발로 싸릿문 밖까지 뛰쳐나와 반갑게 맞아주는 어머니. 하지만 그런 즐거움도 잠시뿐이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온몸이 근질거리고 머릿속엔 온통 운동 생각밖에 없었다.하지만 무료하고 따분하게 여겨지던 휴가중에 내 일생의 소중한 여자를 만나게 될 줄이야. 50리쯤 떨어진 지례면에서 우리 마을로 시집온 언니를 만나러 온 처녀 여우분. 그녀를 본 순간 가슴이 설레었다. 첫눈에 반한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머뭇거리지 않고 대뜸 말을 건넸다. 그녀 또한 대답을 피하지 않았다.

휴가를 끝내고 귀대한 나는 그녀에게 애틋한 편지를 썼다. 곧 바로 답장이 왔다. 그렇게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만난 지 2년 만인 64년 4월 서울 신설동의 한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노량진에 방 하나 부엌 하나인 사글세방을 얻어 달콤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달리기밖에 아는 게 없어 집에 무관심한 나를 뒷바라지하느라 평생 고생만 한 아내. 지금은 장남 호근(34)과 막내딸 명재(28)의 공부 뒷바라지를 하느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다. 하지만 올해 말이면 두녀석 모두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다. 이제라도 편안한 노후를 보내게 해주어야 지난날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것 같다. 내가 마라톤에 눈을 돌린 것은 72년 육군 육상부 감독으로 승격되면서부터. 3군대항 체육대회의 총감독이란 중책을 맡고 일본 전지훈련을 다녀온 후 단거리보다 마라톤으로 승부를 걸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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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 습득한 ‘신지식’

일본서 ‘식이요법’ 전수받고 ‘작품’을 만들던중 정년퇴임.서울올림픽 유치결정뒤 다시 온 기회. ‘88꿈나무’를 이끌고 미국 전지훈련. 그곳서 선진 트레이닝 요령을 배웠다.

70년대 일본의 마라톤은 세계 정상 수준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후퇴와 정체를 거듭한 우리나라 마라톤은 그때까지도 2시간20분대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그때 알게 된 일본인이 「시모노 마사키즈」. 히로시마 서쪽 야마구치현 「호후」라는 작은 도시에서 의료기구 판매회사를 운영하던 기업인이었다. 그는 나의 외당숙인 재일동포 황판숙씨와 아주 절친한 사이. 시모노씨가 주로 활동하던 호후시는 일본 마라톤 명문인 가네부치방적과 쿄와발효회사가 있었다. 나는 그가 두 기업과 사업상 친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회사 육상부 견학을 부탁했다. 시모노씨는 나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여 스스로 재정보증인이 되는 등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문흥주·오태식·최성근 등 쟁쟁한 장거리선수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는 가네부치방적 선수들과 합동훈련을 했다. 우리 선수들은 마라톤 풀코스 42.195㎞ 중 30∼35㎞ 지점에 이르면 기진맥진했다. 그러나 가네부치방적 선수들은 1주일에 200㎞ 내지 250㎞를 거뜬하게 달려내는 것이었다.

시합 당일 아침 보리차 한잔과 찹쌀밥 한공기를 먹고도 좋은 성적을 내는 일본선수들. 가네부치방적 감독은 식이요법에 관한 자문에는 잘 응해주었다. 그러나 마라톤선수의 몸만들기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스트레칭 체조만은 비밀에 부쳤다. 그 체조를 하다가도 나와 우리 선수들이 보이면 체조를 그만두고 트랙을 달리곤 했다.일본에서 귀국한 나는 당장 식이요법을 실시하고 외국에서 나온 각종 비디오 테이프와 서적들을 보며 본격적인 마라톤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82년 국군체육부대인 「상무부대」가 출범했다. 김영관 조폐공사 감독, 박원근 전 제일제당 감독과 20년 가까이 코오롱마라톤팀에서 일하고 있는 임상규코치가 그때 함께 고생하던 선수들. 기록이 차츰 상승되어 가는 그해 6월 3급 군무원 이었던 나는 특무상사로 정년퇴임을 해야 했다. 1∼2년이면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고 벼르던 판에 맞은 정년퇴임. 중도하차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론 아쉬움이 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88년 서울올림픽 유치가 결정된 다음해. 2년간 휴식을 취하고 있던 나에게 새롭게 출범한 체육부에서 88꿈나무들을 이끌고 1개월간 미국 전지훈련을 떠나라고 했다. 오리건주립대학이 훈련지. 제23회 LA올림픽에 대비해 세계적인 육상스타들이 오리건주립대학 트레이닝센터에 모여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육상선수들에게 필요한 웨이트트레이닝과 지형을 이용한 인터벌 트레이닝 요령을 습득했다.

국내 육상계로서는 굉장한 「신지식」. 전국 시·도육상경기연맹 지부 지도자들 앞에서 선진지식을 발표했으나 반응은 냉담했다. 그러나 상무·한국전력·서울시청 육상부에서 나의 이론을 약간씩 수용해 주었다. 그동안 일본·미국 등에서 배운 지식으로 성과를 올려볼 야망을 펼 실업팀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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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독, 금메달 따봅시다”

평소 마라톤에 애정 각별했던 이동찬 회장. 87년 내게 마라톤팀 창단감독을 제의했다. 그동안 쌓은 이론·선진기술 발휘할 기회.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나의 마라톤 인생은 물론이고 한국 마라톤 역사에 가장 중요한 획을 긋게 만들어준 사람이 바로 코오롱그룹 이동찬 회장이다. 이회장이 없었다면 우리 마라톤은 아직도 세계 정상에 우뚝 서지 못했을 것이다.

80년 내가 감독으로 있던 육군 제3사관학교에서 이회장과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평소 마라톤에 각별한 애정을 지니고 있던 이회장이 「2시간10분대 벽」을 깨는 선수에게 1억원의 포상금을 지급하겠다는 선언을 한 뒤였다. 그해에 환갑을 맞은 이회장은 내가 독특한 방식으로 선수들을 지도한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제3사관학교 체육관을 방문했다. 나와 악수를 한 후 몇마디 이야기를 나눈 이회장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꺼낸 흰 봉투 하나를 건넸다. 「선수훈련비에 보태 쓰라」며 준 돈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금인 5백만원이었다.

그리고 다시 이회장을 만나게 된 것은 86년 3월. 코오롱그룹 주최로 대구에서 열린 제2회 전국 남녀고교 구간마라톤대회 심판장을 맡으면서였다. 그해 구간마라톤대회는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대회였다.

남자부에서 우승을 차지한 남원상고팀의 전거리(42.195㎞)주파기록은 「2시간9분22초」였다. 그때까지 한국 마라톤의 숙원인 10분벽 허물기가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고교팀 선수 5명이 이어달리기로 이룬 것이다. 이는 우리 마라톤의 앞날에 광명을 비춰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또한 우승팀인 남원상고의 두 번째 주자였던 김완기는 구간 신기록을 세워 팀의 우승 견인차가 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김완기는 그로부터 6년뒤인 92년 3월 63회 동아마라톤에서 2시간9분31초로 전코스를 주파해 한국에서 세번째로 10분벽을 넘어선 선수가 됐다.

구간마라톤대회 폐회식 직전 가진 점심식사. 남녀 우승팀 교장들과 기자들, 그리고 육상 관계자들과 함께 점심을 들며 환담을 나누던 이회장에게 여러 사람이 마라톤팀 창단을 건의했다. 그러나 이회장은 그 자리에선 확답을 내리지 않았다.

다음해인 87년 3월 제3회 전국남녀고교구간마라톤대회. 똑같은 점심식사 자리에서 또다시 똑같은 대화가 이어졌다. 그 자리에서 코오롱 육상부 설립의 뜻을 밝힌 이회장은 감독을 누가 맡았으면 좋겠냐고 좌중에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대한체육회 부회장 김집, 경북체육회 부회장 박만태,경북출신 육상인 진수학씨 등이 한결같이 『정봉수가 적임자』라며 나를 추천했다. 더욱이 공응대 한양대 체육학과교수는 「과학적인 지도자」라고 보장까지 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이회장의 부름을 받았다.

『코오롱에 마라톤팀을 만들려고 하는데 정감독의 도움이 필요하오. 우리 힘을 합쳐 올림픽 금메달 하나 따봅시다』 솔깃한 제의였다. 일본·미국 등에서 고생 끝에 체득한 선진기술과 몇년간 비디오·관련서적을 탐구하며 세운 이론을 적용해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5월1일을 마라톤팀 창단일로 잡은 후 선수 물색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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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기’로 ‘화려한 서막’

선수 확보난·주위 음해 등 우여곡절속 창단식. 부정선수 낙인, 가출로 헤매던 김완기를 끌어들였다. 혹독한 훈련끝 88년 ‘최우수 신인상’. 그는 ‘코오롱 신화’의 전주곡이었다.

코오롱 마라톤팀 창단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모든 사업이 그렇겠지만 마라톤 역시 단번에 승부를 볼 수 없는 「장기적인 사업」. 성장 가능성이 풍부한 선수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느냐가 최대 관건이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알아보았지만 눈에 확 띄는 선수를 확보하기란 쉽지 않았다. 86서울 아시안게임 5,000‘ 금메달에 1만‘ 은메달리스트인 김종윤과 마라톤 선수로 성장할 가능성이 큰 임정태가 가장 먼저 물망에 오른 선수들.

그러나 걸림돌은 유망선수 확보만이 아니었다. 일부에서는 「단거리선수 출신인 정봉수에게 마라톤팀을 어떻게 맡기느냐」 「마라톤에 대해 정말 아는 게 많느냐」 「정감독은 마라톤 풀코스를 한번도 소화해본 적도 없지 않느냐」는 등의 비아냥과 음해성 발언들이 내 주위를 흘러다녔다. 안팎으로 시달리며 피가 마르는듯한 시간이 계속되었고, 팀을 창단하기로 한 날짜는 쏜살같이 다가오고 있었다. 창단식을 앞두고 임정태는 대구은행 육상부로 진로를 바꿨다. 급기야 김종윤 선수 한명만 데리고 우선 창단식을 갖기로 결정했다.

드디어 5월1일. 서울 무교동의 코오롱빌딩에서 아주 단출한 창단식을 가졌다. 창단식 이후 곧바로 경진실업고교를 다니던 김완기, 경북 예천고교를 졸업한 이창우, 춘천농고 출신인 박재효,경북체고를 졸업한 신재포, 경북 안동 경산고 출신의 오익희 등을 입단시켰다.

우여곡절 속에 창단식을 끝냈지만 앞길은 막막했다. 선수 숙소조차 마련되지 않아 서울 잠실운동장 앞 산장여관에 짐을 풀고 잠실운동장 근처에서 첫 연습을 실시했다. 이 여관은 87년 8월27일 대치동의 한 아파트를 선수숙소로 사들일 때까지 4개월 동안의 임시숙소였다.

코오롱 선수 중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선수는 바로 김완기다. 전북 정읍시 칠보군 백암리가 고향인 김완기는 어렸을 때 친구들에게 걸핏하면 얻어맞은 약골이지만 달리기 하나만은 잘했던 녀석. 85년 중학교 졸업후 정읍농고에 입학했다. 그러나 1학년때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자 86년 육상의 명문인 남원상고에 1학년으로 재입학했다. 그해 제2회 전국남녀고교 구간마라톤대회 우승 주역이었지만 전학이 아니고 1학년 재입학 사실이 드러나자 부정선수로 낙인이 찍혔다.

김완기는 그 충격에 팀을 이탈하고 가출까지 결행했다. 화가난 교장은 그를 퇴학처분했다. 그 무렵 나는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교장선생을 찾아가 퇴학 결정을 번복해달라고 여러 차례 당부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87년 여름 내내 나는 전국을 수소문한 끝에 경기도 과천 누이집 근처의 한 신발공장에서 일하던 완기를 찾아냈다. 여러번 설득한 끝에 그를 경산의 경진실업고교에 입학하게 한 후 마라톤팀에 합류시켰다. 장거리 주자로서 좋은 신체조건을 지닌 완기에게 본격적인 훈련을 시켰다. 혹독한 훈련이지만 불평불만 없이 잘 따라주었다. 그 결과 88년 67회 전국체전 1만‘에 출전하여 30분05초로 3위 입상, 그리고 그해 11월 열린 경부역전 마라톤대회에 전북 대표로 출전해 최우수 신인상을 받았다. 코오롱 마라톤팀의 화려한 시대를 여는 전주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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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너무 탐나는 선수’

‘동아마라톤의 사나이’ 김완기. 90년이후 연거푸 한국신기록 경신. 그러나 국제대회를 앞두면 잇단 부상에 ‘국내용’이란 좋지 않은 닉네임. 그무렵 ‘황영조’가 들어왔다.

88년 서울올림픽. 한국 마라톤 성적은 말이 아니었다. 김원탁·유재성·권상락 등 3선수가 출전했지만 18위·31위와 기권. 2시간10분32초로 뜻밖의 1위를 차지한 이탈리아 겔리도 브르딘이 자국 국기를 휘날리며 잠실 메인스타디움을 도는 광경을 안타깝게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런 참담한 성적을 보면서 다음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에는 반드시 하늘 높이 태극기를 게양하겠 다는 다짐을 했다.

90년은 코오롱 마라톤팀이 황금기를 향해 도약한 첫해. 또한 「철각 마라토너」를 만들어보겠다는 나의 철저한 준비가 비로소 빛을 보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87년 팀창단 이후 김완기를 비롯, 5∼6명 선수들에게 식이요법 프로그램과 함께 도로인 터벌 훈련을 꾸준히 병행했다.

90년 3월 드디어 첫 실험무대가 마련됐다. 잠실∼성남간을 왕복으로 달려야 하는 61회 동아마라톤에 김완기를 출전시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완기는 이 대회에 처녀 도전인데도 불구하고 「2시간11분34초」의 한국신기록을 세우며 우승, 일약 한국 마라톤계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89년 여름과 가을. 경북 경산에서 김완기에게 하루 40∼50㎞를 달리게 했다. 마라톤 완주에 대한 공포를 없애기 위해서 였다. 『달릴 때는 달리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는 김완기. 그는 서울로 올라오는 11월까지 나의 지도에 성실하게 따랐다.

서울 대치동으로 올라온 그해 겨울은 한강고수부지에서 하루 4시간씩 달리게 하면서 거리와 시간 연습을 시켰고 스트레칭·웨이트트레이닝과 수영으로 마라톤 선수에게 필요한 근력을 보강시켰다. 그 결과 잠실∼성남간 코스의 반환점인 언덕길도 선두를 유지하며 달릴 수 있었고, 또 결승점 500‘를 앞두고 동양나이론의 김원탁을 제치고 자신있게 마지막 스퍼트해 우승을 할 수 있었다.

김완기는 우승 기자회견장에서 『20㎞ 지점에서 마라톤 첫 출전의 부담감에 몸이 풀리지 않아 괴로웠으나 반환점을 돌면서 자신감이 생겼고 우승 야망도 일어 역주를 했는데 이는 정감독의 겨울훈련 덕택』이라고 밝혔다.

김완기는 그로부터 2년 뒤인 63회 동아마라톤에서 「2시간9분31초」로 우리나라에서는 세번째로 10분벽을 넘어선 선수가 됐다. 그리고 다시 2년 뒤인 94년 65회 동아마라톤에서 「2시간8분34초」로 한국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 황영조가 92년 벳부∼오이타마라톤에서 세운 2시간8분47초보다 13초나 앞당긴 쾌거였기에 김완기를 「동아마라톤의 사나이」라 불렀다.

그러나 김완기에게는 「국내용」이라는 좋지 않은 닉네임이 붙었다. 아시안게임 등 굵직한 국제대회를 앞두게 되면 부상을 입는 등 이상하게 불운이 겹쳤다. 아무리 연습벌레라 해도 그런 불운 앞에서는 속수무책.

김완기의 동아마라톤 우승 역주로 코오롱마라톤팀 이름이 널리 알려진 90년 3월. 세계적인 마라토너로 성장할 황영조가 입단했다. 황영조는 88년과 89년 치러진 4, 5회 전국남녀고교 구간마라톤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 내 눈에 들었던 「아주 탐나는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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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황영조와 ‘어머니’/일본 단축마라톤 우승 뒤 각 대학서

스카우트 손길.교사가 꿈이던 황영조.그를 설득하러 삼척으로 내달렸다.“스포츠로 이름 떨치라”는 어머니의 한마디.거스를 수 없는 명령이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가슴이 두껍고 하체가 발달해 강한 인상을 심어준 황영조. 첫눈에 마라톤선수로 대성할 재목임을 알아보았다. 코오롱팀에 입단시켜 큰 선수로 키우고 싶었는데 황의 소속학교인 명륜고 교장이 찾아와 황의 코오롱 입단을 요청했다.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러나 황은 부모의 허락이 떨어져야 입단하겠다고 버텼다. 강원 삼척시 근덕면 초공리 출신인 황영조의 원래 꿈은 사범대학에 진학해 교사가 되는 것. 어릴 때 교사는 부모보다도 더 위대한 존재로 보였다고 했다. 고교 2학년때 육상 장거리주자로서의 소질이 드러났다. 3학년때는 고교 육상계에서 5,000‘와 10㎞ 도로 단축마라톤에서 그를 앞지를 만한 선수가 없었다.

89년 12월 일본 호후시에서 벌어진 10㎞ 단축마라톤에 출전한 황영조는 일본 고교 장거리계 1인자 와타나베를 손쉽게 물리치고 우승했다. 와타나베는 장거리 특기자로 와세다대 진학 예정자였다. 이런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자 각 대학에서 황을 스카우트하려고 했다. 당시 황영조는 대학생이 되겠다는 뜻이 강했고 아무 대학이나 골라서 진학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위치에 있었다.

나는 황영조의 고향인 삼척 한 어촌으로 날아가 그의 부모와 만났다. 어업에 종사하는 순박한 부모님은 황영조를 바라본 나의 생각과 그를 어떻게 하겠다는 앞날에 대한 계획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황영조는 마라토너가 지녀야 할 신체적 모든 조건이 완벽합니다. 제게는 세계적인 마라토너를 키워낼 체계적인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저에게 아드님을 맡겨주십시오. 반드시 좋은 성적으로 보답하겠습니다"

황의 아버지는 선생이 되려 대학에 진학하려는 자식의 뜻을 존중해주고 싶은 눈치였다. 그러나 어머니 이만자씨는 달랐다. 믿음직스러운 장남의 남달리 뛰어난 달리기 소질을 썩이는 것을 내심 안타깝게 여기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장남 황영조에게 지극한 정성을 쏟는 분이었고 황영조 또한 어머니가 기뻐하는 얼굴을 보려고 각종 레이스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뛰는 효자였다.

『정감독님, 영조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영조야, 공부에는 때가 있는 법이지만 공부는 천천히 해도 된다. 너는 우선 스포츠계에 나아가 네 이름을 떨쳐라』 어머니의 허락이 떨어졌다. 나의 간곡한 부탁도 부탁이려니와 효자인 황영조는 어머니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권유로 나를 따라 서울로 올라온 황영조는 그날로 대치동 숙소에 합류했다. 선배 김완기와 이창우 등과 수인사를 나눈 후 바로 다음날부터 지독한 훈련에 들어갔다.

나는 아무리 자질이 뛰어난 선수라 할지라도 연습에서의 열외를 인정하지 않는다. 평소의 독한 연습만이 좋은 기록과 성적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맹신한다. 선수들의 연습과 건강, 심지어는 사생활까지도 철저하게 관리한다. 마라톤은 1주일만 연습을 하지 않으면 끝나는 운동이다. 강인한 정신력 없이는 완주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에 마라톤을 철저한 「관리형 스포츠」라고 말한다.

그러나 황영조는 그런 나와 궁합이 맞지 않았다. 그의 빠른 은퇴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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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10분대 벽’ 훌쩍넘다

92년 2월2일 일본 오이타. ‘경제적 주법’ 칭찬받으며 2위 차지한 황영조. 9분대도 아닌 8분대 ‘대기록’. ‘준비된 선수’와 혹독한 훈련의 합작품이었다. 코오롱 입단 첫해인 90년 황영조는 스피드 러너의 면모를 갖추어갔다. 풀코스 마라톤대회에는 일부러 출전을 시키지 않았다.

황은 그해 가을 청주에서 열린 71회 전국체육대회에 출전,육상 일반부 5,000m와 1만m 두 종목에서 각각 대회 신기록을 세우며 2위를 했다.

삼척 해변 모래사장을 놀이터로 삼아 하루종일 뛰어다녀 든든한 체력이 있었고 해녀 어머니를 닮아 일반인보다 좋은 심장을 지녔다. 또한 중학교 3년 동안 사이클 선수로 활동한 까닭에 다리 근력이 좋아 오르막길, 막판 스퍼트에 특별히 강했다. 황은 스스로 계획을 세워 알아서 훈련하는 자주적 성격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인간관리사」 「독사」로까지 불리는 나의 선수관리에 적응하기는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나의 닦달을 정말 많이 참았다. 그러면서도 팀 선배인 김완기를 스승삼아 스피드 훈련을, 같은 나이인 이창우에게는 끈질긴 지구력형 투지를 배워나가는 듯했다.

91년 7월 여름 영국 셰필드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 마라톤에 출전한 황영조는 주로 안내원의 실수로 코스를 100m 이상 더 달리는 해프닝을 벌이고도 2시간12분40초로 우승했다. 습도가 높은 7월 한여름에 마라톤의 적기인 봄대회와 비슷한 기록을 내며 더위에 강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92년 2월2일 일요일. 일본 규슈의 항구도시 오이타에서 한국 마라톤의 새 역사가 기록되었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사가 주최한 41회 벳푸∼오이타마라톤대회에 황영조를 출전시켰다. 기온은 섭씨 8도로 마라톤하기에 아주 적합했다. 오이타 공설운동장을 출발, 온천도시 벳푸를 돌아오는 코스.

나는 황영조에게 선두그룹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말라고 지시했다. TV 생중계를 하던 일본 방송캐스터는 선두그룹에 속하되 화면에 얼굴이 잡히지 않는 황영조를 가리켜 「경제적 주법」이라고 칭찬을 했다. 앞선 선수의 뒤만 놓치지 않고 따라가면 피로가 덜한 법. 반환점을 돌면서 무리지어 달리던 선두그룹이 흩어졌다.

그러면서 멕시코의 디오니시오 셀론이 앞으로 뛰쳐나갔고 황영조는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 셀론이 스피드를 내면 황영조도 같이 스피드를 냈다. 35㎞ 지점. 셀론이 또다시 스피드를 냈다. 황영조는 지쳤는지 조금의 거리를 허용하고 있었다. 아뿔싸. 한국의 고질병이 다시 도지는가 싶었다. 150m 정도가 벌어졌다. 그러나 40㎞ 지점을 지나자 셀론의 스퍼트가 둔화되었다. 황영조는 자신의 페이스 그대로였고. 우승이 보이는 듯했지만 35㎞ 지점부터 벌어진 간격을 좁히지 못하고 결국 2위로 들어왔다.「2시간8분47초」.

한국 신기록은 물론 꿈에 그리던 「마의 10분대 벽」이 9분대도 아니고 8분대를 기록하며 깨지는 순간이었다.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 들고 가슴이 벅차 올랐다. 대회 출전 전 영조의 컨디션으로 보아 10분대는 무난히 깰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8분대 기록은 생각지도 못했다. 겨울훈련 동안 1주일에 240∼250㎞의 긴 거리를 소화하고 스피드를 키우기 위해 야산을 달리게 한 크로스컨트리 훈련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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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만의 ‘올림픽 제패’

92년 바르셀로나 몬주익 동산. 황영조가 일본선수 제치고 ‘손기정의 신화’를 재현. 그와 나는 국민적 스타가 됐다. 그러나 일찍 시든 ‘영웅’. 나는 ‘새 별’을 발견한다. 황영조의 한국 신기록 수립 이후 3월에 치러진 동아마라톤에서도 「마의 10분 벽」을 두 사람이나 깼다. 김재룡과 김완기가 2시간9분30초와 31초. 이들 두 선수와 황영조가 「8월9일 바르셀로나올림픽 D데이」를 위해 훈련에 돌입했다.

지중해 해변의 여름날씨를 감안해 1주당 300㎞를 뛰게 했고 5월에는 하루 60㎞의 거리를 쉬지 않고 전력 질주하게 했다.

6월엔 일본 호후시에서 1개월간 전지훈련을 실시했다. 공설운동장에서 1만m 달리기를 실시한 결과 황영조의 기록이 최고였다. 예감이 무척 좋았다. 7월초 나와 마라톤 대표팀은 바르셀로나보다 평균기온이 3∼4도 높은 스페인 마드리드에 먼저 가서 합숙소를 차렸다. 91년 바르셀로나 마라톤코스를 미리 답사한 결과 당일의 더위를 이기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더위 속에서 훈련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8월6일. 서울에서 온 이동찬 회장의 전화를 받았다. 『그곳으로 가고 싶은데. 내가 가서 선수들 전력에 플러스가 된다면 가고, 되지 않는다면 가지 않겠네』. 나는 『빨리 오십시오』라고 대답했다.

그날이 밝았다. 오전 바르셀로나 일대에 비가 내렸다. 나는 오후 4시까지 선수들에게 휴식을 주었다. 출발시간은 오후 6시30분. 110명의 세계적인 선수가 출전한 42.195㎞의 레이스. 총성이 울렸다. 10㎞ 지점까지는 느린 레이스. 26㎞ 지점 황영조와 김완기가 일본의 모리시타를 가운데 놓고 협공에 들어갔다. 33㎞ 지점서 뒤처지기 시작한 김완기. 남은 것은 황영조와 모리시타. 바로 앞에는 숨가쁜 몬주익 동산. 모리시타의 피곤한 얼굴을 본 황영조가 결승점을 2㎞ 정도 앞둔 몬주익 동산 내리막길에서 맹렬한 스피드로 치고 나갔다.

36년 11회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생이 월계관을 쓴 이후 56년 만에 이룬 세계제패였다.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와 그를 조련시킨 나는 일약 「국민적 스타」로 떠올랐다. 황영조는 94년 보스턴마라톤에서 2시간8분9초로 또다시 한국 신기록을 수립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영웅」 황영조는 너무 갑작스럽게 많은 일을 해냈고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으면서 자신을 주체하기 힘들어했다. 또한 나의 「지속적인 관리」에 불만이 컸다. 그는 연습 때마다 갖은 이유를 달면서 계속 불참했다. 마라톤은 하루 연습 5시간 중에서 10분만 적게 해도 정상을 지킬 수 없다. 조금만 참고 더 연습을 했으면 올림픽 2연패도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천부적 재능과 체력을 지녔는데 정말 안타깝기 그지 없다.

96년 동아마라톤을 끝으로 황영조는 조기은퇴했다. 아끼는 제자, 좋은 선수를 한명 잃는다는 허탈감에 건강도 무척 나빠졌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나의 지도자론은 더 확고하게 정립되었다. 즉 「지도자는 선수에게 끌려다녀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

93년 10월 광주 전국체전에서 나는 내가 점찍어둔 유망주의 건재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시립대를 다니면서 서울시청에 적을 두고 있던 이봉주. 전국체전 마라톤에서 「2시간10분27초」를 기록하며 체전 MVP에 올랐다. 그해 말 이봉주는 시울시청을 떠나 코오롱으로 소속을 옮겨 나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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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남은 ‘시드니의 휴일’

뒤돌아보면 운동화 발자국만 보이는 내인생. 이봉주의 ‘로테르담 쾌거’도 시작에 불과. 21세기 첫 올림픽서 태극기를 다시 올리는게 남은 꿈. 그때까지는 앞만보고 달려야 한다. 요즘 나는 「로테르담의 영웅」 이봉주의 사생활을 관리하느라 정신이 없다.

「만년 2인자」 자리에서 벗어난 그가 황영조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하는 괜한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내가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라고 주위에서는 말한다. 그래도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봉주를 불러 앉혀놓고 정신무장시키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내가 마라톤계에서 은퇴하기 전 이뤄야 할 마지막 일은 2000년 호주 시드니올림픽 메인스타디움 꼭대기에 태극기를 올리는 것이다. 작전명은 「시드니의 휴일」. 그날을 위해서 나는 이봉주를 포함한 코오롱 선수들과 함께 뛸 것이다.

지난 4월19일 이봉주가 로테르담에서 수립한 한국 신기록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연습벌레 이봉주의 최고기록은 「2시간07분44초」. 세계 최고기록 「2시간06분50초」와는 54초 차이. 그러나 35㎞ 지점까지는 세계 기록과 동등했다. 나머지 7㎞를 어떻게 달리게 하느냐가 관건이다.

훈련에 임하는 이봉주를 보면 나는 아주 흡족하다. 내성적인 성격 탓인지 모르지만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별로 없는 듯하고, 훈련에 임하는 것 자체를 즐거워 하는 걸 보면 시드니올림픽까지는 무난할 것 같다. 또한 지난 96년 동아마라톤에서 대학생 신분으로 황영조를 꺾고 3위에 입상한 후 코오롱에 입단한 후배 김이용이 함께 훈련을 하니 이봉주도 한결 든든하리라 생각한다.

남은 이야기 하나. 우리 여자 마라톤계에도 서광이 비치고 있다. 97년 10월 벌어진 춘천 국제마라톤에 처음 풀코스에 도전한 권은주(코오롱)가 「2시간26분12초」로 한국 여자 마라톤 신기록을 세우며 「30분 벽」을 돌파했다. 이는 97년 세계 랭킹 7위의 기록이다. 97년 3월 코오롱에 입단하면서 기록이 일취월장하고 있다. 쇼트피치 주법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스피드가 장점으로 곧 세계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것이다.

최근 나의 건강은 좋지 않은 편이다. 아직 큰 문제는 없지만 20여년 전부터 시작된 당뇨가 괴롭히고 있다. 술은 7 ̄8년 전에 완전히 끊었고 4년정도 담배를 끊었다가 요즘은 가끔 한대씩 피우곤 한다.

한달에 한번 정도 당뇨 때문에 정기적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2년밖에 남지 않은 「시드니의 휴일」을 위해서, 언제 갑자기 다가올지 모를 「세계신기록 수립의 그날까지」 나는 현장에 남아 코오롱 소속 선수들과 함께 도로훈련을 할 것이다. 그 정도의 체력은 아직도 남아 있다.

뒤돌아보면 운동화 발자국만 새겨진 트랙과 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나의 인생.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길을 뛰어야 할까 심히 걱정도 된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택한 나의 길. 조금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마라톤의 길」. 그 아득했던 길이 곧 인생이었다. 힘 안들이고 날아가거나 비켜갈 수는 없다. 오로지 두 발로 달려가야 한다.<조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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